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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길을 묻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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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보

[단편소설]길을 묻다 -하

이원화-청해진완도 금일출신, 소설가

<단편소설> 길을 묻다 -하

        길을 묻다

        이 원 화(38, 금일출신, 소설가)

   
▲ 이원화 소설가


지난 2006년1월1일 광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길을 묻다” 당선자 이원화 씨는 전남 완도군 금일읍 출신으로 본지의 요청에 따라 신춘문예당선작 단편소설을 고향신문인 청해진신문 연재에 흔쾌히 승낙하며 당선소감을 말했다.

친구와 함께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눈 때문에 버스가 자주 오지 않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이 50여명 쯤 되었을까.
친구에게 신문사래! 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먼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둘이 안고 한참 소리를 지르다가 이러다 파출소에 끌려가겠다며, 웃었다.
지금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 때 지른 소리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전화를 받는 순간, 주위 분들께 고맙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기에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다 적기엔, 원고지 네 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동안 지켜봐 주시고, 격려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늘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아들 최유민이와 딸 최선다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소설 쓴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가장 큰 짐을 나누어진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이 있게 한 남편 앞에서 이젠 울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남편과 함께 한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사랑한다고, 가만히 남편의 이름을 불러본다.
길을 열어주신 윤대녕 선생님, 공지영 선생님, 이만큼 키워주신 채희윤 선생님, 용매 언니를 비롯한 아름다운 도반(친구), 언니들께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푸른 파도 일렁이는 고향 바다가 보고 싶다. <200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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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길을 묻다(하)- 이원화


 다른 대부분의 환자나 보호자들이 그렇듯 쉽게 의사의 말을 납득할 수도 없었고, 납득한다 하더라도 전문 암센터에 간다면 좀 더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길 위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병원의 예약 시간과 맞추기 위해 밤이나 낮이나 차를 타고 떠돌아야 했다. 검사실을 찾기 위해 층마다 코너마다 안내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이 그곳 같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늘 허둥거렸다. 병원은 거대한 밀림 같았다.


아니 거대한 수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지도 모른다. 한번 들어가면 벗어날 수 없는, 한 발 담그면 나머지 발까지도 기어이 끌어들이고 마는 거대한 수렁. 그 수렁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한 웅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견딜 수 없어 면도날로 맨들맨들하게 남편의 머리카락을 밀어내면서, 곧 치료만 끝나면 머리카락은 금방 자랄 테니 이 기회에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자며 웃었다. 

 

 낯선 땅에서 혼자 맞는 저녁. 창밖으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일쯤 보름인가보다. 내일 밤엔 꽉 찬 보름달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인일실로 배정 받은 방엔 밤늦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문을 닫으면 저절로 잠금 상태가 되는 호텔방문의 특성상 누군가 벨을 누르면 깨어 있다가 문을 열어줘야 할 것 같았다. 디럭스트윈룸 더블베드에 혼자 누워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쪽저쪽으로 맞춰보다가 텔레비전을 끄고, 내일 일정표를 꼼꼼히 읽고, 가져간 책을 몇 페이지 보다가 책을 덮어 버렸다.


누구라도 함께 달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다. 달빛 환한 바닷가에서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업어주던 남편. 발에 묻은 물기를 닦고 모래를 털어주느라 호호, 입김을 불던 남편…….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달 때문인지도 몰랐다. 늘 집에서 혼자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으면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바로 옆방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을 김 기자에게 맥주라도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하려다 포기했다. 요염한 달빛이 비쳐드는 방안에서 밤을 함께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달빛 때문이었다고, 혹은 술 때문이었다고 핑계 대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호텔 주위를 산책하고 돌아와 식사를 하면서 전체 진행자에게 물었다.

 “원래 이인일실 사용 아닌가요? 밤새도록 기다렸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새벽 다섯 시에 시내에 나가 과일 등의 간식을 준비 해 왔다는 진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집에 전화하세요. 얼른 오시라고.”

 아이들밖에 없는 집에 뭐라고 전화를 해야 할까. 옆에 있던 김 기자가 끼어들었다.

 “오메, 나 부르제. 할아버지 때문에 집에서도 안 보는 연속극이란 연속극은 다 봤는디…….”

 뭔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소 내가 보내는 보도 자료의 내용에 따라 신문 기사가 달라지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을 전화로 물어오는 경우도 많아 일주일에 한두 번쯤은 꼭 통화를 하는 김 기자는 사실 나의 사적인 부분은 거의 모를 것이다. 취재차 기자가 방문했을 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통화를 통해 아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는 김 기자였다. 나 자신 스스로 남편에 관한 부분을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사회부에서 십년을 보낸 기자라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낙화암에 올랐다. 처자식을 제 손으로 모두 죽이고 나온 계백 장군의 오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싸워 이틀 만에 패하자, 궁녀 삼천 명이 백마강에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궁녀들의 죽음을 미화시키고 은유시켜, 꽃이 떨어져 내린 바위로 불리는 낙화암에서 탁하게 흐르는 백마강의 물줄기를 보았다. 산자의 편에서 기록되는 역사, 백제를 망하게 했던 신라가 쓴 역사는 철저하게 의자왕을 패악한 왕으로 몰아 민심을 수습하려 했을 것이다. 역사는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더 해 부풀려 기록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백마강에서 부부가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강변의 갈꽃을 보다가 부선장인 부인에게 소망을 물어보았다.


 “우리야 뭐, 이제 애들도 많이 커서 쉬엄쉬엄 하는 거지요. 큰 소망이랄 게 있겠어요. 그저 강변에 갈대나 꽃을 좀 더 심어서 관광객이나 좀 늘었으면 좋겠어요.”


 아침 8시부터 해질녘까지 손님이 일곱 명만 타면 무조건 출발한다는 부선장의 수줍은 소망에 맞아요, 하며 마주보고 웃었다.


소망은 하늘의 별을 따야하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사소하지만 삶의 힘이 되어주는 그런 것이다. 관광객이 늘어 수입이 늘면 고단함 따윈 까맣게 잊고 집에 돌아가 아이들과 살 부비고 누워 하룻밤을 보내는 것, 그것이 소망을 넘은 삶의 가장 원초적 행복일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기 위해 박물관에 갔다. 세 발로 중심을 잡고 한 발을 허공에 세운 채 입으로 여의주 대신 향로의 몸체를 받든 용의 모습이 마치 우리 가족의 모습 같았다.


기둥이 되어 서로를 받치고 있는 아이들과 나, 그리고 허공에 자리한 남편. 스물네 옆의 연꽃잎 모양의 몸체 아랫부분에는 현실과 상상 속에 나타나는 동물과 물고기와 인물상이, 뚜껑인 윗몸체에는 일흔네 개의 산봉우리에 상상과 현실 속의 동물 서른아홉 마리와 다섯 명의 악사를 비롯한 열여섯 명의 인물상이, 향로의 손잡인 맨 윗부분에는 여의주를 턱밑에 끼고 날아오르는 봉황이 표현되어 있었다. 향로에 표현된 여러 형상들의 정교함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문양과 문양 사이사이로 구멍까지 뚫려 있어 향을 피우면 그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고 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시간이 녹아 흐르는 향로 앞에서 시간의 깊이를 보고 있었다. 연꽃잎 속에 흐르는, 삶속에 자리한 종교의 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종교, 거기 실린 사람들의 염원. 다섯 명의 신선인 악사들이 들고 있는 악기들의 현을 켜면 향로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구름인 양 그 향에 취해 선계를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새 춤을 추고 있었다. 현을 켜고 있었다. 벽화 속 여인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선계의 남편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로 빛나는 백제금동대향로에서 남편이 줌-인으로 내게 오고 있었다. 향로의 연기 속에서 유영하는 남편은 관자재보살이었다. 미륵부처였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하자, 열두 살 아들이 호주가 되어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나의 보호자, 열두 살, 겨우 초등학교 5학년 아들. 남편의 호적을 정리하고 발급 받은 주민등록등본을 아들에게 보여주며 네가 우리 집 호주다. 네가 내 보호자다, 하고 씁쓸하게 웃었을 때 아이는 만화 영화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의 신학기 생활기록조사서의 아버지 이름란에 이름을 적어 넣어야하나 말아야하나, 한참을 망설였다. 아이들의 뿌리가 남편에게 닿아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공란으로 남길 수 없었다. 이혼의 경우는 또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각자 다른 집에서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 경우는 어떻게 적을까. 분명한 건 현재형을 표시 해 줘야했다. 주민등록등본 한 통을 첨부하라는 학교생활 안내서를 보며 결국 이름을 적지 못했다. 생활기록조사서의 아버지 이름란을 공란으로 보내고, 먼 거리 통학하는 딸아이의 교통편을 처음엔 돌아가면서 승용차로 태워다 주자고 했다가, 말도 없이 아이를 빼 버린 이웃 엄마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서로 다른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며 그 아이 엄마들에게 물어보라고 말할 때, 남편 때문은 아닐까 생각되어 서러움 때문에 한나절을 울었다. 때로는 사람이 사람을 더 견디기 어렵게 한다.


 카드사에 내 명의의 카드 발급신청서를 냈으나 남편이 같은 집에서 살지 않는 것, 외의 모든 조건이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소식이 없다. 아이는 아침이면 오빠보다 먼저 나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은 여전히 결혼식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하루하루 남편이 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주말이면 남편을 찾아가 그의 집에 돋아난 잡풀을 뽑아내기도 하고, 이름 앞에 등 돌리고 서서 날마다 그가 바라보고 있을 들판을 향해 서 있기도 하고, 주위의 다른 무덤에 성묘 온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남편에게서 등 돌리고 서서 바라보는 먼 산의 아득함. 남편이 늘 내가 오는 길을 살피고 있는 거라면 남편의 이름에서 등을 돌려 바라보는 것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살라던 결혼식 주례사를 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햇살 가득한 남편의 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말부분가? 생각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을 권유하는 주위의 여러 이야기들에도 나는 병원을 고집했다. 남편에게 삶을 정리하라는 따위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죽음을 의미하는 호스피스 병동으로의 입원은 삶의 포기로 여겨졌고, 마지막까지도 그의 죽음을 남편도 나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에 생긴 종양의 압박 때문에 바로 누우면 숨을 쉴 수 없어 늘 왼쪽으로 돌아누워 있어야하는 남편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빨리 힘내서 일어나야지? 어떻게 해 줄까?”

 마치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 양 밝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힘이 없어 눈도 잘 뜨지 못하는 남편이 원한 것. 단 하나. 

 “손으로 좀 만져 줘. 거길 좀 만져 줘.”


 첫아이로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기저귀를 갈 때마다 시어머닌 아이의 고추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려주라고 늘 당부를 했다.

 “사내아이의 고추는 늘 만져서 올려주는 것이란다. 그래야 고환의 협착을 막을 수 있어. 만져주지 않아서 고환이 한 쪽으로 몰리면 걸음걸이가 불편해지고, 성인이 되어도 낫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거듭된 당부에도 쉽게 아이의 고추를 만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기저귀를 손에 들고 시늉만으로 아이의 고추를 올려줄 뿐이었다.


잠자리에서 어쩌다 남편의 요구가 있을 때에도 쉽게 응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하루하루 상태가 나빠지면서 성기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살이 빠지면서 뼈만 앙상한 치골을 왼손으로 더듬어 주름진 채 올라붙은 고환과 새끼 손가락만한 성기를 만져 주물러주고, 오른손으론 링거액 바늘이 꽂힌 남편의 왼 쪽 어깨를 조심스레 만져주며 차라리, 차라리, 단 1초라도 빨리 숨이 끊겨 남편의 고통이 멈출 수 있기를 기원했다. 두 아이를 낳고 10년 넘게 살 섞고 살아온 남편의 성기는 아무리 정성껏 만져도 반응이 없었다.


남성으로서의 반응이 아니라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치골에 올라붙어 있던 성기의 종잇장처럼 얇은 표피가 따뜻함으로 힘없이 풀어질 때, 남편은 잠시 아픔을 잊었다. 하루하루 양을 늘려 24시간 투여하는 진통제로도 멈출 수 없는 남편의 고통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손안에서 느끼는 온기로 남편이 살아있음을 느껴야 했다.


눈을 맞추고 욕창이 생기려는 어깨죽지와 엉덩이뼈를 손으로 만져 풀어주고 공기가 통하도록 해 주는 것, 그리고 왼 손으로 그의 성기를 만져주는 것, 그 외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암이라는 게, 마지막엔 뼈 속으로 전이가 됩니다. 뼈마디마디 아프지 않은 곳이 없게 되요. 좀 더 강한 진통제를 처방하겠습니다.”


 의사는 차트를 들여다보며 아침 밥상에 올라온 나물의 간을 말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하루하루 마약 성분 진통제의 양을 늘려 처방하는 것이 의사 역할의 전부인 양 했다.

 남편이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들이 병문안을 왔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에서의 직분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준비 중이오니 그 영혼을 받아주소서. 예비된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우리 성도를 맞이해 주소서……. 아멘.”

 무슨 소린가? 예비된 천국의 문을 열어 그를 맞이해 달라니. 지금 남편을 빨리 데려가 달라는 얘긴가? 감았던 눈을 뜨고 남편을 보았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고 있는지 모르는지 남편의 얼굴은 평온했다. 목사의 입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다. 한 생의 결과가 천국에 이르는 것과 그렇지 않음으로 평가되려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의 생활이 오직 천국에 가기 위한 한 생이었음을 말하는 목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선악의 대비로 천국과 지옥을 나뉘어왔다면 지금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선하게, 착하게 살았으므로 천국이 예비되어 있다면 지금 남편의 몸은 아프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신이 있어 신을 증명하는 거라면 지금 남편은 일어나야 맞다. 징벌 때문에 몸이 아픈 거라면 남편은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은 아직 자신의 직분을 다 수행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남편이 필요하다. 천국에 이르는 조건을 나는 모른다. 어쩌면…….

남편이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단 1초라도 빨리 그가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말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미묘한 상태의 흥분. 또는 기대감. 팔십여 명의 전체 참가자 중 몇 명이 어울려 함께 백제의 밤거리를 구경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들러 노래를 부르다가 슬그머니 빠져 나와 혼자 호텔로 돌아왔다. 김 기자는 지금 쯤 어디에 있을까.


 관광호텔이라고는 하지만 산 속에 있는 듯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호텔 주위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거둬들이지 않은 볏짚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밝은 보름달 아래서 이슬을 밟으며 들길을 걷는 기분도 괜찮았다. 하얗게 서리가 피어나는 들길에서 어김없이 남편을 떠올리고 있었다. 남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내가 산 자와 죽은 자들로 나뉜 길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중간한 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미안하네, 그 한마디에 발목이 잡혀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만 그 무거운 짐을 부려놓고 싶다. 휘황한 보름달이 이제 이쯤에서 그 짐을 부려놓을 때가 되지 않느냐고 부추겼다. 달빛에 기대어 밤새도록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일 따윈 잊고 싶었다.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단 한사람, 동행한 김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연히 창문을 열었다가 혼자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아줌마가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럼 아줌마는 걷는 것도 안 된데요?”

 맞받아치는 나에게 김 기자는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더 했다.


 “집에 있는 아저씨가 알면 어쩌려고…….”

 “집에 있는 아저씨? 그럼 남편 있는 여자는 걷는 것도 안 되면 남편 없는 여자는 어떤가요? 남편 없는 여자는 아무하고나 걸어도 되나요?” 

 “어쨌거나 선생님은 남편이 있잖아요.”

 “김 기자님은, 부인, 사랑, 하나요?”


 남편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없어요, 라고. 남편은 죽었어요, 라고. 그의 집과 내 집이 다르죠,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 끝을 마치듯 그렇게 쉽게 남편에 대한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다. 몰라서 좋은 부분도 있는 것이다. 굳이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묻어두고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 회진을 왔던 의사가 나를 불러 오늘 잘 지켜보세요, 라고 말했다. 마침 저녁 식사 배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복도엔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환자보호자들과 환자들이 수저나 반찬통 찌개 냄비 등을 들고 오가고 있었다. 마치 생소한 이국의 언어인 양 되물었다. 어떻게요? 어떻게 보는 것이 잘 보는 건데요?


 그날 밤 남편은 그와 나 사이의 끈질긴 인연의 끈을 놓았다. 그렇게 남편을 보냈다. 의사의 말이 가장 정확한 건 그 한마디였다. 그 밤 남편은 죽었다. 새벽이 되기 전에……. 미안하네, 한마디를 남기고…….

여전히 왼 손으로 그의 성기를 만지며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죽지를 만지는 나를 두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끈을 놓으며 남편은 위안에 있던 모든 내용물들을 토해냈다. 남편이 내게 미안한 것은 뭐였을까.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던 긴 인연의 끈을 툭, 소리나게 끊어내면서 오히려 현생을 통한 내생의 마술로 나를 묶어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심폐소생술을 할까요? 묻는 간호사에게, 하지 마세요. 편안하게 보내주세요. 하고 말했다.  심폐소생술을 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온 몸 구석구석 암세포가 퍼진 남편을 심폐소생술로 갈비뼈를 모조리 부러뜨려 놓은 뒤 살려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울지 않았다. 울 수도 없었다. 독한 년, 스스로에게 욕을 하면서 안심했다.


이젠 남편이 편안해졌을거라 여겨져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이제 남편은 아프지 않을 것이다. 춥지 않을 것이다.


 심장 박동수를 기록으로 남겨야하거든요. 간호사는 이미 사망한 남편의 심전도를 체크하고 심장박동수를 0으로 기록하며 남편의 공식 사망을 알렸다.

그들에겐 남편의 사망이 그저 일상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은 한 남자였다. 영안실로 남편을 옮기는 그 순간 다른 환자의 침상을 마련하는 일상,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관심도 없는 하루치의 일상일 뿐이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벽화 보았죠? 기분이 어땠어요?”

 엉뚱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리며 김 기자에게 물었다.

 “이 밤중에 죽은 사람들 이야기는 무슨…….”

 “사랑을 믿으세요? 어쩌면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모두 한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요? 백제금동대향로는 어떻든가요?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분리되던가요? 원죄의식 같은 거 느껴지지 않았어요?”


 내 손 안에서 느꼈던 남편의 생명과 마지막 온기. 손 안에 남은, 그 따뜻한 느낌을 지울 수 있을까. 지울 수 있다면 무엇으로 그 기억을 대신할까. 다시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사랑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남편의 짐을 부려놓고 그와 하룻밤을 보내도 괜찮을 것도 같았다. 달빛에 기대어보는 것도 내 생의 아름다운 한 때 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함께 한 이 공간에서라면 내일의 시간 따위는 잠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남편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사랑과 미안의 간극. 그 틈 속에 남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들어있다.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의 깊이와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의 깊이. 남편은 그 시간의 깊이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나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앞으로의 시간을 꿈꾼다. 죽은 자들에겐 없는 것, 영원히 멈춰진 것. 시간.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시간을 묻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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