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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바른생각, 바른미래 지향운동 확산되길!사설 바른생각, 바른미래 지향운동 확산되길! 우리민족 고유의 명절인 구정이 다가오고 있다. 지역경제가 어려워 매년 완도지역의 인구 1,200~1,500여명이 줄고 있다. 시골에 일할 자리가 부족해 먹고 살기가 힘들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떠난다고 한다. 2009년 기축년 새해에는 많은 일자리와 마음이 포근한 이웃을 만났으면 한다는 독자의 말을 듣고 건강의 섬 완도! 청해진 완도는 바른생각과 바른미래를 지향하는 마음을 갖는 운동이 확산되었으면 한다. 어느 역사학자가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꿀벌이 날아와 꽃으로부터 꿀을 빼앗아가는 순간부터 그 꽃은 수정(受精)되어 열매를 맺기 시작 한다’는 것이다. 꽃을 향하여 날아갈 때 꿀벌은 꽃으로부터 꿀을 빼앗아가려는 것이다. 기나긴 시간 동안 어려움을 인내하며 꿀을 모으고 간직해온 꽃으로서는 가장 귀한 것을 도둑질 당하는 셈이다. 그런데 벌이 날아와서 꽃으로부터 꿀을 빼앗아가야만 꽃은 수정이 되어 열매 맺을 가능성을 얻게 된다. 실패와 고난 속에 살아온 만큼 우리는 겸손과 자기부정의 열매를 얻는다. 현실과 세상에서 가능성을 잃어버린 그만큼 고난과 좌절 속에 과거를 빼앗긴 우리는 ‘미래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열매로 얻는다. 꿀벌과 꽃에 대하여 말했던 역사학자는 이런 글도 남겼다. ‘어느 사람을 파멸시키려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과 권력에 미치게 한다’는 것이다. 물질과 권력에 과도하게 집착한 인간과 사회는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서울서초교회 강희창 목사에 따르면 인격은 나의 내면에 머무는 것이라서 겉으로 금방 드러나지 않는다. 권력이나 물질은 겉으로 금방 드러날 수 있지만 나의 내면으로 들어오지는 못한다. 아무리 많다 해도 권력이나 물질은 나의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많은 권력과 물질을 확보한 인간은, 그 귀한 것들을 나의 내면에 영원히 품을 수 없어서 안타까움 속에 살아간다. 혹시 생각지 못한 시간에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릴까 불안과 염려 속에 살아가야 한다. 물질과 권력에 대한 열망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갈증과 탐욕을 일으킨다. 그러다 보면 우리 영혼은 미래와 희망보다는 현재와 가시적 증거에 붙들릴 것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쫓아다니게 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야 한다. 권력과 물질과 현재보다는 미래와 희망과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목사는 주장한다. 은혜를 모르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물질과 권력에 과도하게 집착한 인간과 사회는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정치는 사기라고 TV와 지역에서 수없이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다. 세상을 향하여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믿음 소망 사랑을 앞세워 살아가며 은혜를 아는 바른생각, 바른미래 지향운동이 확산되길 기원한다.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 www.wandonews.kr입력:200901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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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떠난 김두석 해경서장, 고향 후배들에게 좋은선배완도 떠난 김두석 해경서장, 고향 후배들에게 좋은선배 후배들이여 꿈과 비젼을 가져라 !지난 2008년12월29일 오전10시 완도해양경찰서장 김두석 총경께서 군외중학교 구대현 교장선생의 초청으로 모교 후배학생들에게 열정을 다해서 특별강의를 하는 모습을 취재했다. 50여명의 전교학생들에게 기념품을 전달하기도 했다. 강의내용은 "후배들이여 꿈과 비젼을 가져라!" 세부교육은 완도해경의 조직과 업무 해양경찰관의 비젼 등을 상세히 설명하며 군외면출신으로 후배들에게 경험담을 강의하는 내용이다. 떠날 때가 되었다며 마무리를 분주히 준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인근 각급학교 강의와 오지에서 고생하는 노인들과 소년소녀 가장 등을 수시로 돌보는 모습을 보았다. 고향에서 해양경찰서장 업무는 참으로 힘들었다면서 후임서장님이 오시더라도 나의 일처럼 협력해 주실 것을 고향의 유지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군외중학교 구대현 교장선생은 2008년 전라남도 교육청 학교평가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상금 400만원을 수여받아 폐교위기에서 늘 외로움과 투쟁해야했던 군외면에게 다시금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화제가 되었다. 군외중학교는 지난 수년간 보충수업을 선생님들이 무료로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야간자율학습이후 차량운행이 어려워서 교장선생님 이하 선생님과 인근교회차량으로 통학을 봉사한 교사들의 숭고한 제자사랑은 군외면의 훈훈한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원동마을 하수종말처리장 사업과 국토4차선 확포장 사업으로 인하여 부단히 노고가 많은 구대현 교장선생의 건의와 군외중학교 총동문회의 간곡한 민원으로 김종식 완도군수께서 우천중에는 학교운동장의 흙탕물이 범람하여 수업에 지장이 많다고 하여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운동장에 모래살포를 해주기로 했으며 군외중학생들에게 격려를 해 주기도 했다. 한편, 군외중학교 재학생들은 완도 떠난 김두석 해경서장이 고향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로 강의한 “후배들이여 꿈과 비젼을 가져라”를 영원히 기억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 *사진: 김두석 완도해양경찰서장과 직원들 <완도서부 정완봉 기자>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www.wandonews.kr 입력:200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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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신안비금 칠발도 수장사건김용웅씨, 부친의 억울한 누명 벗기겠다 완도주민 1백여명 신안 칠발도 수장의혹 제기 ▲ 김용웅 회장(판용. 전,완도군청년회 초대회장) “독립유공자인 부친 이야기만 나오면 한이 서립니다. 한 맺힌 사연을 지금이라도 풀어야 해요. 우리세대가 증언하지 않으면 한국전쟁의 비극적 역사는 영원히 햇볕을 보지 못한 채 비밀로 묻힐 것입니다.” 김용웅씨(판용,67·완도읍 망남리,전 완도군청년회 초대회장)는 한국전쟁 중 아버지를 잃었다. ▲ 故 김 향 남 (용웅씨 부친, 독립유공자) ▶부친이었던 故김향남씨(당시 41세)가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돼 1950년 7월20일께 완도주민 100여명과 함께 목포경찰에 의해 전남 신안군 비금면 고서리 산243~4번지 칠발도 해상에서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새로운 의혹을 당시 운송했던 선박기관사의 증언에 따라 제기하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의 신속한 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김씨의 부친은 지난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광주 항일 학생 독립운동'의 선동자로 대구고등법원 판결문에 따라 처벌받아 1993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애족장훈장을 서훈 받았으며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지난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희생당한 학생 수는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검거 당한 사람이 1,462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아버지가 보도연맹에 가입할 이유가 없었다고 봐요.” 아직까지도 용웅씨는 부친이 어머니와 함께 고기를 잡아 장사를 하는 성실한 어민이었다는데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배경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품고 있다. 김씨에 따르면 1950년 6,25당시 금융조합에 쌀,부식 등을 운반하는 장영호 화물선은 소금400포대를 실을 수 있는 30~40톤급의 목선으로 경찰에 의해 선원들도 보지 못하게 하였으나 짐칸에 보도연맹 관련 완도주민 30여명을, 금일쪽에서 동신호에 70여명을 총100여명을 싣고 목포경찰에 인계했다는 말을 올 초에 생존해 있는 기관사인 곽모씨(95,완도읍)로 부터 진실화해위원들과 함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는 것. ▶김씨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부친의 유골을 찾기위해 수소문했지만 그동안 사망원인을 알 길이 없었으나 올해 장영호기관사 곽co씨에 의해 칠발도 해상에서 수장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동안 해남보련 학살에 의해 진도 갈매기섬에서 사망한 걸로 잘못 알았다고 말했다. 김씨가 9살 때 당시 부친(당시 41세)은 고향인 청산면 여서도에 있다가 하루내내(24시간) 풍선(돛단배)을 타고 완도항에 오후 늦게 도착하여 집에서 자다가 새벽에 맨발로 끌려갔다. 모친께서 따라 나서니 경찰은 총으로 위협하며 주민들도 구경을 못하게 들어가라며 협박하며 故 문승수씨(독립유공자)와 故 김향남(김씨의 부친, 독립유공자)씨 두분을 맨발로 제일앞에 세우고 머리에 포대를 쒸우고 완도중학교앞에서 30여명을 끌고가 장영호에 실었다. ▶완도를 출발한 장영호가 목포에 도착하여 목포경찰에 인계했는데 예인선(일명:히끼난치)에서 목포경찰은 장영호와 동신호가 싣고 온 완도주민 100여명을 쇠파이에 손과 다리를 OP선(전기줄)으로 묶어 싣고는 신안군 비금면 칠발도 해상으로 가서 수장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장영호 기관사 곽co씨가 증언했다는 것. 또, 김씨가 생존해 있는 장영호 항해사 김mc씨에게 들은 내용도 목포에 장영호가 도착하니 동신호가 먼저 와 있었으며 금일쪽 죄수들 70여명을 싣고 왔다고 전했다는 것. ▶이에 20여년전 사망한 장영호선장 곽모씨(당시70세)가 생존해 있을 때 김씨의 누님(73세)이 곽선장을 만나 부친의 제사를 당시 음력6월3일에 지내고 있다고 하니 틀리다며 1950년7월20일(음,6월4일)에 지내라고 날짜를 가르쳐주며 다른 말은 일체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닫아 버렸다고 한다. ▶이후 장영호는 서모씨(완도읍 주도리)집에서 인수하여 주도앞에서 물막이 수리를 하고 완도~부산간 화물을 싣고 다니는 부정기화물선으로 운행했다는 것. ▶완도지역 보도연맹관련 100여명의 주민을 장영호와 동신호가 목포경찰에 인계했으나 현재 장영호 선장은 20여년전 사망했으며 기관사인 곽모씨(95)와 선원 곽모씨(75)는 완도읍에 거주하며 항해사인 김모씨는 현재 목포에 생존해 있다. 당시 목포경찰이 예인선(일명:히끼난치)에 옮겨실은 후 신안군 비금면 칠발도해상에서 수장한 의혹이 짙으나 장영호 관련된 사람들은 어떤 압력에서 인지 여부는 불투명하나 그동안 억울하게 죽어간 100여명의 사건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함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95세인 장영호 기관사의 증언으로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100여명의 무고한 완도주민들의 학살, 칠발도 수장사건이 신속히 조사되어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 김용웅씨(판용,67·완도읍 망남리,전 완도군청년회 초대회장)는 억울하게 사망한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실화해위원회에 조사의뢰하여 지난 5월에 조사를 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갈매기섬 보도연맹사건과 분리하여 “장영호,동신호 칠발도 수장사건”으로 신속한 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 “전쟁 때문에 인생의 행로가 바뀌어 버렸다. 부친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반드시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이미 바뀌어 버린 인생의 행로를 돌이킬 순 없지만 지난 역사에 대한 신원을 통해 억울한 주검만큼은 반드시 명예회복이 돼야 하지 않을까. ▲ 칠발도 - 신안군 비금면 고서리 산243~4번지 완도주민 1백여명 신안 칠발도 수장의혹 제기 한편, 신안군 비금면사무소 강영종 계장은 본지 전화인터뷰에서 칠발도는 무인도로 비금면고서리 산243~4번지이며 1996년까지 등대 관리사가 상주했으나 등대가 자동화되어 현재는 무인도로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 332호 칠발도 해조류(바다제비, 슴새,칼새) 번식지로 지정되었으며 비금도에서 서북쪽으로 30분거리로 약 10㎞ 가량 떨어진 등대섬으로 경사가 가파른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전했다. 강계장은 칠발도 부근해역이 7등선으로 암초식 모래층으로 형성되어 항해 어려움으로 해난사고가 많은 지역이며 비금면사무소에서 오래 근무했으나 완도지역 사람들을 칠발도해역에 수장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70~80대의 노인들에게 6,25 당시 사건들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보도연맹(國民輔導聯盟)이란: 1949년 좌익인사 교화 명목으로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은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등 거의 강제적인 단체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국적인 민간 학살의 희생양이 됐다. <김용환 대표기자>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 www.wandonews.kr 입력:2008,10,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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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나주경찰부대사건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나주경찰부대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07년 10월23일 제56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나주경찰부대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편집자 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공식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07년 10월23일 제56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나주경찰부대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나주경찰부대가 1950년 7월25일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마산면 상등리, 마산면 화내리, 현산면 일평리, 7월26일 완도군 완도읍, 7월28일 소안면 비자리, 7월 29일 노화읍 이포리 배남재에서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환영하자 좌익척결과 적을 환영했다는 이유로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사실이 규명되었다고 밝혔다. 조사결과 나주경찰부대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25일 경 陸路를 통한 후퇴가 불가능하자 海路를 이용하기위해 나주시 → 해남군 → 완도군으로 이동 중 ▲해남군 △해남읍 △마산면 상등리 △마산면 화내리 △현산면 일평리 ▲완도군 △완도읍 완도중학교 △소안면 비자리 △노화읍 이포리 배남재 등 7개 지역에서 지역 주민 97명을 사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각 지역별 사건 참조> □ 각 지역별 주요 사건 △ 해남읍 사건 7. 25. 10:00~14:00. 나주경찰부대가 가가호호 수색. 8개 마을 34명 근접사격 사살 △ 마산면 상등리 사건 7. 25~27. 인민군 환영장에 모인 주민과 좌익척결을 이유로 15명 사살 △ 마산면 화내리 사건 7. 25. 주민들이 인민군을 환영. 전임 농민위원장 父子 사살 △ 현산면 일평리 사건 7월 하순. 길거리에서 ‘인민군 만세’라고 외친 3명 사살 △ 완도중학교 인민군환영대회 사건 7. 26. 환영대회장에서 주민 1명 사살. 현장에서 체포·구금자는 완도경찰이 희생시킴 △ 소안면 비자리 사건 7. 28. 인공기를 게양한 채 상륙하여 주민 3명 사살 △ 노화읍 배남재 사건 7. 29. 인공기를 게양한 채 상륙하여 주민 5명 사살 ▶나주 경찰부대 사건 진실규명 결정 요지 I. 사건 개요 1. 사건 접수 및 처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위원회’)’에 2005년 12월 5일부터 2006년 11월 30일까지 한국전쟁 시기 전라남도 해남군, 완도군 일원에서 발생한 ‘나주경찰부대에 의한 희생 사건’으로 신청한 사건 건수는 해남군 25건, 완도군 78건 등 총 103건이고, 신청인은 해남군 23명, 완도군 71명 등 총 94명이며, 신청인이 주장하는 사건 관련 희생자 수는 해남군 28명, 완도군 80명 등 총 108명이다. 2. 신청인의 주장 신청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나주경찰부대사건은 1950년 7월 하순,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마산면, 화산면, 현산면, 송지면 그리고 완도군 완도읍, 청산면, 노화읍, 소안면, 보길면, 금당면 등지에서 나주경찰부대 소속 경찰에 의해 지역주민 약 108명이 불법적으로 희생당했다는 사건이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 나주경찰부대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해남읍을 경유하여 완도읍으로 후퇴 하였는바, 인민군으로 위장한 후 1950년 7월 하순, 해남군 해남읍에 도착 읍내를 수색하면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주민들을 희생시키고,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 화산면 해창리, 현산면 일평리, 송지면 석수리에서 지역주민들을 희생시켰다. 이후 완도읍으로 진입하면서 완도군 완도읍 죽청리에 도착하여 지역주민들로 하여금 인민군환영대회를 열게 하였고, 완도읍에서는 인민군으로 위장한 채 지역주민들을 완도중학교에 모이게 하여 인민군환영대회를 열게 한 후 여기에 참석 한 다수의 지역주민들을 희생시켰다. 아울러 완도군 관내 도서(島嶼)지방 즉 청산면, 노화읍, 소안면, 보길면, 금당면 등지에 진입하여 지역주민들을 희생시켰다. Ⅱ. 결론 및 권고사항 1. 결론 가. 나주경찰부대는 △1950년 7월 25일 오전 해남읍에 진입하여, 좌익척결 등의 이유로 가가호호 수색하면서 해남읍 주민들을 근접사격 혹은 정조준 사격하여 희생시켰다 △1950년 7월 25일 오후 마산면 상등리에서 인민군환영을 위해 모였던 주민에게 난사하여, 26일과 27일에는 인민군환영장 참석과 좌익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을 총살하였다 △1950년 7월 25일 오후 마산면 화내리 주민들을 좌익이라 하여 해남경찰서에서 희생시켰다 △1950년 7월 25일 경 오후 현산면 일평리 도로상에서 우연히 조우한 주민들이 ‘인민군만세’라 외쳤다 하여 총살시켰다. 또한 △나주경찰부대는 1950년 7월 26일 오전 완도읍 소재 완도중학교에 진입하여 인민군환영을 위해 모인 주민을 희생시키고, 다수를 체포하여 완도경찰서에 구금시켰다. 7월 26일부터 완도경찰은 구금 중이던 주민들과 완도중학교에서 도망한 주민들을 체포하여 여러 장소에서 희생시켰다 △1950년 7월 29일 오후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은 노화읍 이포리에 상륙하여 선창가에 모인 주민들을 배남재로 끌고 가 희생시켰다 △1950년 7월 28일 오전 나주경찰부대는 소안면 비자리에 상륙하여 주민들을 희생시켰다. 나. 각 사건별 희생 현황은 다음과 같다 - 이원암 외 36명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7월 25일 오전부터 점심직후 까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 수성리, 구교리, 남동(외)리, 신안리, 읍내리, 중앙리, 성내리, 우슬재 일대에서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 김영욱 외 13명은 1950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 일대에서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 민병남 외 1인은 1950년 7월 25일 오후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화내리에서 연행되어 해남읍 소재 해남경찰서에서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 임상호 외 1인은 1950년 7월 25일 경 오후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일평리에서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 김진호 외 34명은 1950년 7월 26일 오전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소재 완도중학교에서 있었던 인민군환영대회 사건과 관련하여 각각의 장소·일시에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 이상배 외 4명은 1950년 7월 29일 오후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읍 이포리 소재 배남재에서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 김형연 외 1인은 1950년 7월 28일 오전 전라남도 소안면 비자리에서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다. 조사결과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에 의한 사건의 희생자 중 신원을 확인한 수는 해남군 55명, 완도군 42명 등 총 97명이다. 희생자는 해남군의 경우, 이원암, 조통실, 유부용, 민육옥, 전사옥, 김진용, 김흥수, 김길용, 김응준, 나경집, 곽준, 박막동, 김재수, 김문심, 최대집, 오성태, 김영욱, 장선화, 박돌석, 신백호, 임상순, 강병수, 김보문, 김옥현, 임상호, 임용호, 김기복(비신청), 천일득(비신청), 임홍옥(비신청), 이삼봉(비신청), 백일언(비신청), 백일언의 자(비신청), 박옥배(비신청), 이갑주(비신청), 김종수(비신청), 김갑수(비신청), 이종국(비신청), 김경채(비신청), 박남석(비신청), 김막동(비신청), 김형해(비신청), 이연심(비신청), 김기문(비신청), 김연복(비신청), 덕이 아버지(비신청), 이창주(비신청), 유병래(비신청), 유길동(비신청), 김영식(비신청), 박수남(비신청), 박수남의 부인(비신청), 민병남(비신청), 민완기(비신청)이고, 총상에 의한 부상은 김기순(비신청), 김태환(비신청)이다. 완도군의 경우 김진호, 김방호, 임재택, 박상선, 박문희, 박봉진, 정만탁, 이기용, 김경환, 우영석, 이채강, 김순남, 조현민, 지동필, 박동규, 최갑수, 최규남, 정재현, 박창손, 박양손, 박창오, 박영철, 박성원, 박상균, 박상섭, 지치규, 최병연, 최조휴, 강사규, 최동휴, 이봉년, 박몽길, 이상배, 정금성, 김상규, 박상후, 박형열, 김형연, 최영휴(비신청), 이일남(비신청), 김우진(비신청), 이정오(비신청)이다. 라. 희생자 97명은 모두 해남군 및 완도군 관내 주민들이며, 이들 중 절반이상은 농·어업 종사자이고 20~30대가 가장 많다. 아울러, 여성은 6명이고 부자(父子) 등 가족 희생자도 33명이다. 마. 조사결과 희생자들은 모두 비무장, 비전투원으로 일부 희생자가 경찰을 보고 놀라 도망친 것 외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 복장으로 변복은 하지 않았으나 자신들이 경찰임을 적극적으로 감추고 진입하여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오인케 유도하였는바, 오인한 주민들이 인민군을 환영하였다하여 주민들을 희생시켰다. 바.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이 주민들을 희생시킨 과정에서는 어떠한 법적 처리절차도 수반되지 않았다. 설령 희생자들이 실제 인민군을 환영하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하였더라도 사건 당시 발효 중이던 법에 따라 처리했어야 마땅하나,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은 그러하지 아니하고 주민들을 즉결처형 하였다. 사.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의 책임자의 지휘 하에 민간인 희생사건이 발생하였는바, 이들의 권한은 상부기관인 전남경찰국-치안국-내무부로부터 위임된 것이므로 이 사건과 같이 경찰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민간인희생의 최종적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아. 아울러 이 사건은 비록 전시라고 하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소임을 지켜야 하는 경찰이 후퇴 중 적에게 동조할 것으로 의심되는 지역 주민을 임의적으로 불법 살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경찰은 ‘전란 피난민의 소개와 구호활동에 노력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피난치 못한 채 불안에 떨고 있는 주민들을 계도하여 안전을 도모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찰은 오히려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어 지역 주민들을 함정에 빠뜨린 후 지역 주민들이 적을 환영하였다 하여 아무런 절차도 없이 즉결처형 하는 범법행위를 하였다. 이로 인한 희생 당사자의 죽음도 억울하지만 유족들 역시 가족구성원 상실 이후 현재까지 국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큰 고통을 받아 왔다. 2. 권고 또는 화해조치 가. 명예회복 조치 1) 국가의 공식 사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경찰이 주민들을 함정에 빠뜨린 후 비무장 무저항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처형한 것은 불법행위이다. 또한 사건 발생 이후 반세기 이상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지 않아 그 피해 당사자를 욕되게 하고, 그 유족들의 고통을 지속시켰는바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 역시 크다. 따라서 국가는 먼저 사건 희생자와 관련 유족들에게 성의를 다하여 사과해야 한다. 2) 위령사업의 지원 희생자를 위로하는 위령제는 물론 위령사업이 이 사건 발생 이후 단 한번도 없었는바, 유가족들이 위령사업을 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고, 희생자들의 죽음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위령비 등 기억 시설을 건립할 것을 권고한다. 3) 호적 정정 희생자들의 호적을 검토한 결과 사망날짜와 사망 장소를 정확히 기재하지 못한 경우가 많으므로 유가족이 원할 경우 법적 절차를 통해서 올바로 정정할 것을 권고한다. 나.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 1) 역사기록의 수록 및 수정 국방부와 경찰청 등 한국전쟁 전사(戰史)에 이 사건과 같은 아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이 반드시 수록되어 반면교사로 삼아져야 한다. 나주경찰부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은 작전 개념으로 보거나 전술상으로도 실패한 교훈이며,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례이다. 이에, 국방부와 경찰청 등의 한국전쟁 전사에 이 사건을 수록하여 교훈으로 삼기를 권고한다. 아울러,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기초로 이 사건을 과도하게 기록하고 있는 군지(郡誌)의 수정을 해남군과 완도군에 권고한다. 2) 평화인권교육 강화 경찰과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전시 민간인보호에 관한 법률과 국제 인도법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이 사건은 국가권력이 허위로써 국민을 기만할 때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므로 국민의 생명과 보편적 인권의 소중함을 함양하는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할 것을 권고한다. 3) 관련 법률의 정비 이러한 역사적 과오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전시 비무장민간인보호와 인권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 www.wando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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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보고의 노래장보고의 노래 (장보고기념관 개관에 부쳐) 시인 서 해 식 (전남문인협회회원) 서남해상 다도해에 꽃비가 내릴 때 상황봉 정기 받아 님이 오셨네 대양을 개척할 용사가 되어 청해진 건설하고 세계로 뱃길 열었지 장보고 선단은 서해를 평정했네 오늘도 그 바다엔 뱃고동 소리 울린다. 바다여 말하라 파도여 노래하라 님께서 헤쳐가신 뱃길을 따라 살맛나는 새 세상을 향하여 우린 항해를 멈추지 않으리라 영원히 거친 광풍이 휘몰아친다해도 장보고의 열린 세상에서 돛을 내려라 아득한 바닷길이 험난한 길을망정 야망의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넜지 오늘 세계화의 선구자가 되어 우리들 가슴에 불꽃되어 타오르네 세계속에 눈부실 조국 강산아 장보고 정신으로 승리의 노랠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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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길을 묻다 -하<단편소설> 길을 묻다 -하 길을 묻다 이 원 화(38, 금일출신, 소설가) ▲ 이원화 소설가 지난 2006년1월1일 광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길을 묻다” 당선자 이원화 씨는 전남 완도군 금일읍 출신으로 본지의 요청에 따라 신춘문예당선작 단편소설을 고향신문인 청해진신문 연재에 흔쾌히 승낙하며 당선소감을 말했다. 친구와 함께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눈 때문에 버스가 자주 오지 않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이 50여명 쯤 되었을까. 친구에게 신문사래! 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먼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둘이 안고 한참 소리를 지르다가 이러다 파출소에 끌려가겠다며, 웃었다. 지금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 때 지른 소리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전화를 받는 순간, 주위 분들께 고맙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기에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다 적기엔, 원고지 네 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동안 지켜봐 주시고, 격려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늘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아들 최유민이와 딸 최선다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소설 쓴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가장 큰 짐을 나누어진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이 있게 한 남편 앞에서 이젠 울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남편과 함께 한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사랑한다고, 가만히 남편의 이름을 불러본다. 길을 열어주신 윤대녕 선생님, 공지영 선생님, 이만큼 키워주신 채희윤 선생님, 용매 언니를 비롯한 아름다운 도반(친구), 언니들께 깊이깊이 감사드린다. 푸른 파도 일렁이는 고향 바다가 보고 싶다. <2005,12,30.> ----------------------------------------------------[단편소설] 길을 묻다(하)- 이원화 다른 대부분의 환자나 보호자들이 그렇듯 쉽게 의사의 말을 납득할 수도 없었고, 납득한다 하더라도 전문 암센터에 간다면 좀 더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길 위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병원의 예약 시간과 맞추기 위해 밤이나 낮이나 차를 타고 떠돌아야 했다. 검사실을 찾기 위해 층마다 코너마다 안내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이 그곳 같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늘 허둥거렸다. 병원은 거대한 밀림 같았다. 아니 거대한 수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지도 모른다. 한번 들어가면 벗어날 수 없는, 한 발 담그면 나머지 발까지도 기어이 끌어들이고 마는 거대한 수렁. 그 수렁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한 웅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견딜 수 없어 면도날로 맨들맨들하게 남편의 머리카락을 밀어내면서, 곧 치료만 끝나면 머리카락은 금방 자랄 테니 이 기회에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두자며 웃었다. 낯선 땅에서 혼자 맞는 저녁. 창밖으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일쯤 보름인가보다. 내일 밤엔 꽉 찬 보름달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인일실로 배정 받은 방엔 밤늦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문을 닫으면 저절로 잠금 상태가 되는 호텔방문의 특성상 누군가 벨을 누르면 깨어 있다가 문을 열어줘야 할 것 같았다. 디럭스트윈룸 더블베드에 혼자 누워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쪽저쪽으로 맞춰보다가 텔레비전을 끄고, 내일 일정표를 꼼꼼히 읽고, 가져간 책을 몇 페이지 보다가 책을 덮어 버렸다. 누구라도 함께 달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다. 달빛 환한 바닷가에서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업어주던 남편. 발에 묻은 물기를 닦고 모래를 털어주느라 호호, 입김을 불던 남편…….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달 때문인지도 몰랐다. 늘 집에서 혼자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으면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바로 옆방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을 김 기자에게 맥주라도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하려다 포기했다. 요염한 달빛이 비쳐드는 방안에서 밤을 함께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달빛 때문이었다고, 혹은 술 때문이었다고 핑계 대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호텔 주위를 산책하고 돌아와 식사를 하면서 전체 진행자에게 물었다. “원래 이인일실 사용 아닌가요? 밤새도록 기다렸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새벽 다섯 시에 시내에 나가 과일 등의 간식을 준비 해 왔다는 진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집에 전화하세요. 얼른 오시라고.” 아이들밖에 없는 집에 뭐라고 전화를 해야 할까. 옆에 있던 김 기자가 끼어들었다. “오메, 나 부르제. 할아버지 때문에 집에서도 안 보는 연속극이란 연속극은 다 봤는디…….” 뭔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소 내가 보내는 보도 자료의 내용에 따라 신문 기사가 달라지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을 전화로 물어오는 경우도 많아 일주일에 한두 번쯤은 꼭 통화를 하는 김 기자는 사실 나의 사적인 부분은 거의 모를 것이다. 취재차 기자가 방문했을 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통화를 통해 아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는 김 기자였다. 나 자신 스스로 남편에 관한 부분을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사회부에서 십년을 보낸 기자라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낙화암에 올랐다. 처자식을 제 손으로 모두 죽이고 나온 계백 장군의 오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싸워 이틀 만에 패하자, 궁녀 삼천 명이 백마강에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궁녀들의 죽음을 미화시키고 은유시켜, 꽃이 떨어져 내린 바위로 불리는 낙화암에서 탁하게 흐르는 백마강의 물줄기를 보았다. 산자의 편에서 기록되는 역사, 백제를 망하게 했던 신라가 쓴 역사는 철저하게 의자왕을 패악한 왕으로 몰아 민심을 수습하려 했을 것이다. 역사는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더 해 부풀려 기록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백마강에서 부부가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강변의 갈꽃을 보다가 부선장인 부인에게 소망을 물어보았다. “우리야 뭐, 이제 애들도 많이 커서 쉬엄쉬엄 하는 거지요. 큰 소망이랄 게 있겠어요. 그저 강변에 갈대나 꽃을 좀 더 심어서 관광객이나 좀 늘었으면 좋겠어요.” 아침 8시부터 해질녘까지 손님이 일곱 명만 타면 무조건 출발한다는 부선장의 수줍은 소망에 맞아요, 하며 마주보고 웃었다. 소망은 하늘의 별을 따야하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사소하지만 삶의 힘이 되어주는 그런 것이다. 관광객이 늘어 수입이 늘면 고단함 따윈 까맣게 잊고 집에 돌아가 아이들과 살 부비고 누워 하룻밤을 보내는 것, 그것이 소망을 넘은 삶의 가장 원초적 행복일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기 위해 박물관에 갔다. 세 발로 중심을 잡고 한 발을 허공에 세운 채 입으로 여의주 대신 향로의 몸체를 받든 용의 모습이 마치 우리 가족의 모습 같았다. 기둥이 되어 서로를 받치고 있는 아이들과 나, 그리고 허공에 자리한 남편. 스물네 옆의 연꽃잎 모양의 몸체 아랫부분에는 현실과 상상 속에 나타나는 동물과 물고기와 인물상이, 뚜껑인 윗몸체에는 일흔네 개의 산봉우리에 상상과 현실 속의 동물 서른아홉 마리와 다섯 명의 악사를 비롯한 열여섯 명의 인물상이, 향로의 손잡인 맨 윗부분에는 여의주를 턱밑에 끼고 날아오르는 봉황이 표현되어 있었다. 향로에 표현된 여러 형상들의 정교함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문양과 문양 사이사이로 구멍까지 뚫려 있어 향을 피우면 그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고 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시간이 녹아 흐르는 향로 앞에서 시간의 깊이를 보고 있었다. 연꽃잎 속에 흐르는, 삶속에 자리한 종교의 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종교, 거기 실린 사람들의 염원. 다섯 명의 신선인 악사들이 들고 있는 악기들의 현을 켜면 향로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구름인 양 그 향에 취해 선계를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새 춤을 추고 있었다. 현을 켜고 있었다. 벽화 속 여인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선계의 남편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로 빛나는 백제금동대향로에서 남편이 줌-인으로 내게 오고 있었다. 향로의 연기 속에서 유영하는 남편은 관자재보살이었다. 미륵부처였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하자, 열두 살 아들이 호주가 되어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나의 보호자, 열두 살, 겨우 초등학교 5학년 아들. 남편의 호적을 정리하고 발급 받은 주민등록등본을 아들에게 보여주며 네가 우리 집 호주다. 네가 내 보호자다, 하고 씁쓸하게 웃었을 때 아이는 만화 영화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의 신학기 생활기록조사서의 아버지 이름란에 이름을 적어 넣어야하나 말아야하나, 한참을 망설였다. 아이들의 뿌리가 남편에게 닿아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공란으로 남길 수 없었다. 이혼의 경우는 또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각자 다른 집에서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 경우는 어떻게 적을까. 분명한 건 현재형을 표시 해 줘야했다. 주민등록등본 한 통을 첨부하라는 학교생활 안내서를 보며 결국 이름을 적지 못했다. 생활기록조사서의 아버지 이름란을 공란으로 보내고, 먼 거리 통학하는 딸아이의 교통편을 처음엔 돌아가면서 승용차로 태워다 주자고 했다가, 말도 없이 아이를 빼 버린 이웃 엄마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서로 다른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며 그 아이 엄마들에게 물어보라고 말할 때, 남편 때문은 아닐까 생각되어 서러움 때문에 한나절을 울었다. 때로는 사람이 사람을 더 견디기 어렵게 한다. 카드사에 내 명의의 카드 발급신청서를 냈으나 남편이 같은 집에서 살지 않는 것, 외의 모든 조건이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소식이 없다. 아이는 아침이면 오빠보다 먼저 나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은 여전히 결혼식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하루하루 남편이 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주말이면 남편을 찾아가 그의 집에 돋아난 잡풀을 뽑아내기도 하고, 이름 앞에 등 돌리고 서서 날마다 그가 바라보고 있을 들판을 향해 서 있기도 하고, 주위의 다른 무덤에 성묘 온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남편에게서 등 돌리고 서서 바라보는 먼 산의 아득함. 남편이 늘 내가 오는 길을 살피고 있는 거라면 남편의 이름에서 등을 돌려 바라보는 것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살라던 결혼식 주례사를 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햇살 가득한 남편의 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말부분가? 생각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을 권유하는 주위의 여러 이야기들에도 나는 병원을 고집했다. 남편에게 삶을 정리하라는 따위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죽음을 의미하는 호스피스 병동으로의 입원은 삶의 포기로 여겨졌고, 마지막까지도 그의 죽음을 남편도 나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에 생긴 종양의 압박 때문에 바로 누우면 숨을 쉴 수 없어 늘 왼쪽으로 돌아누워 있어야하는 남편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빨리 힘내서 일어나야지? 어떻게 해 줄까?” 마치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 양 밝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힘이 없어 눈도 잘 뜨지 못하는 남편이 원한 것. 단 하나. “손으로 좀 만져 줘. 거길 좀 만져 줘.” 첫아이로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기저귀를 갈 때마다 시어머닌 아이의 고추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려주라고 늘 당부를 했다. “사내아이의 고추는 늘 만져서 올려주는 것이란다. 그래야 고환의 협착을 막을 수 있어. 만져주지 않아서 고환이 한 쪽으로 몰리면 걸음걸이가 불편해지고, 성인이 되어도 낫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거듭된 당부에도 쉽게 아이의 고추를 만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기저귀를 손에 들고 시늉만으로 아이의 고추를 올려줄 뿐이었다. 잠자리에서 어쩌다 남편의 요구가 있을 때에도 쉽게 응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하루하루 상태가 나빠지면서 성기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살이 빠지면서 뼈만 앙상한 치골을 왼손으로 더듬어 주름진 채 올라붙은 고환과 새끼 손가락만한 성기를 만져 주물러주고, 오른손으론 링거액 바늘이 꽂힌 남편의 왼 쪽 어깨를 조심스레 만져주며 차라리, 차라리, 단 1초라도 빨리 숨이 끊겨 남편의 고통이 멈출 수 있기를 기원했다. 두 아이를 낳고 10년 넘게 살 섞고 살아온 남편의 성기는 아무리 정성껏 만져도 반응이 없었다. 남성으로서의 반응이 아니라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치골에 올라붙어 있던 성기의 종잇장처럼 얇은 표피가 따뜻함으로 힘없이 풀어질 때, 남편은 잠시 아픔을 잊었다. 하루하루 양을 늘려 24시간 투여하는 진통제로도 멈출 수 없는 남편의 고통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손안에서 느끼는 온기로 남편이 살아있음을 느껴야 했다. 눈을 맞추고 욕창이 생기려는 어깨죽지와 엉덩이뼈를 손으로 만져 풀어주고 공기가 통하도록 해 주는 것, 그리고 왼 손으로 그의 성기를 만져주는 것, 그 외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암이라는 게, 마지막엔 뼈 속으로 전이가 됩니다. 뼈마디마디 아프지 않은 곳이 없게 되요. 좀 더 강한 진통제를 처방하겠습니다.” 의사는 차트를 들여다보며 아침 밥상에 올라온 나물의 간을 말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하루하루 마약 성분 진통제의 양을 늘려 처방하는 것이 의사 역할의 전부인 양 했다. 남편이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들이 병문안을 왔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에서의 직분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준비 중이오니 그 영혼을 받아주소서. 예비된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우리 성도를 맞이해 주소서……. 아멘.” 무슨 소린가? 예비된 천국의 문을 열어 그를 맞이해 달라니. 지금 남편을 빨리 데려가 달라는 얘긴가? 감았던 눈을 뜨고 남편을 보았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고 있는지 모르는지 남편의 얼굴은 평온했다. 목사의 입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다. 한 생의 결과가 천국에 이르는 것과 그렇지 않음으로 평가되려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의 생활이 오직 천국에 가기 위한 한 생이었음을 말하는 목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선악의 대비로 천국과 지옥을 나뉘어왔다면 지금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선하게, 착하게 살았으므로 천국이 예비되어 있다면 지금 남편의 몸은 아프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신이 있어 신을 증명하는 거라면 지금 남편은 일어나야 맞다. 징벌 때문에 몸이 아픈 거라면 남편은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은 아직 자신의 직분을 다 수행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남편이 필요하다. 천국에 이르는 조건을 나는 모른다. 어쩌면……. 남편이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단 1초라도 빨리 그가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말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미묘한 상태의 흥분. 또는 기대감. 팔십여 명의 전체 참가자 중 몇 명이 어울려 함께 백제의 밤거리를 구경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들러 노래를 부르다가 슬그머니 빠져 나와 혼자 호텔로 돌아왔다. 김 기자는 지금 쯤 어디에 있을까. 관광호텔이라고는 하지만 산 속에 있는 듯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호텔 주위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거둬들이지 않은 볏짚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밝은 보름달 아래서 이슬을 밟으며 들길을 걷는 기분도 괜찮았다. 하얗게 서리가 피어나는 들길에서 어김없이 남편을 떠올리고 있었다. 남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내가 산 자와 죽은 자들로 나뉜 길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중간한 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미안하네, 그 한마디에 발목이 잡혀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만 그 무거운 짐을 부려놓고 싶다. 휘황한 보름달이 이제 이쯤에서 그 짐을 부려놓을 때가 되지 않느냐고 부추겼다. 달빛에 기대어 밤새도록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일 따윈 잊고 싶었다.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단 한사람, 동행한 김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연히 창문을 열었다가 혼자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아줌마가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럼 아줌마는 걷는 것도 안 된데요?” 맞받아치는 나에게 김 기자는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더 했다. “집에 있는 아저씨가 알면 어쩌려고…….” “집에 있는 아저씨? 그럼 남편 있는 여자는 걷는 것도 안 되면 남편 없는 여자는 어떤가요? 남편 없는 여자는 아무하고나 걸어도 되나요?” “어쨌거나 선생님은 남편이 있잖아요.” “김 기자님은, 부인, 사랑, 하나요?” 남편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없어요, 라고. 남편은 죽었어요, 라고. 그의 집과 내 집이 다르죠,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 끝을 마치듯 그렇게 쉽게 남편에 대한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다. 몰라서 좋은 부분도 있는 것이다. 굳이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묻어두고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 회진을 왔던 의사가 나를 불러 오늘 잘 지켜보세요, 라고 말했다. 마침 저녁 식사 배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복도엔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환자보호자들과 환자들이 수저나 반찬통 찌개 냄비 등을 들고 오가고 있었다. 마치 생소한 이국의 언어인 양 되물었다. 어떻게요? 어떻게 보는 것이 잘 보는 건데요? 그날 밤 남편은 그와 나 사이의 끈질긴 인연의 끈을 놓았다. 그렇게 남편을 보냈다. 의사의 말이 가장 정확한 건 그 한마디였다. 그 밤 남편은 죽었다. 새벽이 되기 전에……. 미안하네, 한마디를 남기고……. 여전히 왼 손으로 그의 성기를 만지며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죽지를 만지는 나를 두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끈을 놓으며 남편은 위안에 있던 모든 내용물들을 토해냈다. 남편이 내게 미안한 것은 뭐였을까.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던 긴 인연의 끈을 툭, 소리나게 끊어내면서 오히려 현생을 통한 내생의 마술로 나를 묶어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심폐소생술을 할까요? 묻는 간호사에게, 하지 마세요. 편안하게 보내주세요. 하고 말했다. 심폐소생술을 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온 몸 구석구석 암세포가 퍼진 남편을 심폐소생술로 갈비뼈를 모조리 부러뜨려 놓은 뒤 살려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울지 않았다. 울 수도 없었다. 독한 년, 스스로에게 욕을 하면서 안심했다. 이젠 남편이 편안해졌을거라 여겨져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이제 남편은 아프지 않을 것이다. 춥지 않을 것이다. 심장 박동수를 기록으로 남겨야하거든요. 간호사는 이미 사망한 남편의 심전도를 체크하고 심장박동수를 0으로 기록하며 남편의 공식 사망을 알렸다. 그들에겐 남편의 사망이 그저 일상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은 한 남자였다. 영안실로 남편을 옮기는 그 순간 다른 환자의 침상을 마련하는 일상,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관심도 없는 하루치의 일상일 뿐이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벽화 보았죠? 기분이 어땠어요?” 엉뚱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리며 김 기자에게 물었다. “이 밤중에 죽은 사람들 이야기는 무슨…….” “사랑을 믿으세요? 어쩌면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모두 한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요? 백제금동대향로는 어떻든가요?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분리되던가요? 원죄의식 같은 거 느껴지지 않았어요?” 내 손 안에서 느꼈던 남편의 생명과 마지막 온기. 손 안에 남은, 그 따뜻한 느낌을 지울 수 있을까. 지울 수 있다면 무엇으로 그 기억을 대신할까. 다시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사랑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남편의 짐을 부려놓고 그와 하룻밤을 보내도 괜찮을 것도 같았다. 달빛에 기대어보는 것도 내 생의 아름다운 한 때 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함께 한 이 공간에서라면 내일의 시간 따위는 잠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남편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사랑과 미안의 간극. 그 틈 속에 남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들어있다.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의 깊이와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의 깊이. 남편은 그 시간의 깊이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나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앞으로의 시간을 꿈꾼다. 죽은 자들에겐 없는 것, 영원히 멈춰진 것. 시간.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시간을 묻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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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문학가-에세이"주부는 죄인"에세이- "주부는 죄인" 시인 황 경 연 ▲ 시인 황경연 ‘주부’라는 이름의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상한선도 하한선도 없는 아주 맹랑한 직업입니다. 출근도 없고, 퇴근도 없는 아주 붙박이 직장입니다. 승진도 없고, 휴가도 없고, 보너스도 없습니다. 보수요? 굳이 챙기자면 가족들의 사랑과 그들의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접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타박 일색’입니다. 집안이 어질러져 있거나 설거지가 안 되어 있을 때, 또 그날 입어야 할 옷이 완벽 하게 준비되지 않았을 때 ‘주부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모든 가족이 정색하며 따집 니다. ‘주부’는 모든 식구에게 영원히 갚을 길 없는 빚진 죄인입니다.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놀다가 무릎이 깨져도 ‘도대체 집에서 뭐했기에 아이가 이 모양이냐?’고 합니다. 아이가 성적이 떨어졌다든지, 친구들과 어울려 귀가가 늦어지면 ‘엄마라는 사람이 자식들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 모양이냐?’고 호통입니다. 주부가 참다 참다 하루 이틀 몸져눕기라도 하면 집에서 한 게 뭐가 있어 아프냐며 한마디 합니다. 그것은 곧 비수가 되어 주부의 가슴팍에 꽂혀 좀체 빠질 생각을 안 합니다. 주부는 짜증을 받아내는 바구니입니다. 이것저것 구분 없이 집어던져진 짜증을 가 득안고 종일 삭히느라 가슴이 아립니다. ‘주부’라는 직업을 가진 것이 죄일까요? 때로 주부도 지칠 때가 있습니다. 주부도 짜증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주부도 사표를 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이를 혼자 낳은 것도 아니고, 혼자 기를 수도 없습니다. 특히 사내아이들은 아버 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도 있습니다. 주부 혼자 모든 것을 다 해내리라는 기대는 접어주세요. 주부는 완전한 사랑 제조기가 아닙니다. 함량이 특대인 전천후 사랑제조기는 더욱 아닙니다. 퍼내고 퍼내면 더러 마르기도 하는 샘. 제 몸 다 부서질 때까지 일하고 나면 어느 한 순간 멈춰버리고 마는 여리디 여린 사랑 제조기일 뿐입니다. 주부는 완전한 스펀지가 아닙니다. 함량이 특대인 스펀지는 더욱 아닙니다. 일정량의 물을 빨아들이고 나면 수명이 다하듯 가족들의 짜증과 불평을 있는 대로 받다보면 멈춰버리는 한정된 용량의 스펀지일 뿐입니다. 황경연 : 청해진향우, 시인(월간 창조문예 등단)/동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는 위대하다.’ 외./ 시종중앙교회 송남용 목사의 사모/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886-1 시종중앙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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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아동 성폭력 범죄자 2명 구속우리 딸 괜찮을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광주검찰청 해남지청(지청장 양부남)은 완도군 관내지역에서 장애인 여학생에게 성추행과 성폭행 등을 일삼은 완도군관내 모읍 A모 이장과 모면 B모씨 등 2명을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하여 12월26일 기소했다. 준 공무원인 모읍 A모 이장은 장애인 아동을 돌보아야 할 위치의 마을유지가 성폭력범죄자로, 또 모면 B모씨도 장애 어린이 등을 성폭행하여 성폭력범죄자로 구속되어 기소되었다. 완도군 관내 학교들은 겨울방학에 들어갔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장애인 여학생들을 성폭력으로 부터 보호하는 군민들의 많은 관심과 대책이 필요하다. 전남경찰청 여자기동대장에 따르면 모면 B모씨는 수산양식인으로 장애여학생 등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와, 모읍 A모 이장은 장애여학생 등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철저한 수사를 거쳐 12월12일 구속하여 해남검찰에 17일 송치하여 검찰은 26일 공소를 제기했다는 것.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사단법인 지체장애인협회 완도군지부는 장애인 아동과 장애인 가정을 성폭력범죄로 부터 보호해야한다는 강력한 대책을 관계기관에 요구키로 하겠다고 밝혔다. 전남 완도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지난해 2006년288건의 상담 및 2007년1월1일부터 12월20일까지 총540건의 상담업무를 취급했다며 대부분 피해자가족들은 딸의 장래를 생각하여 속앓이를 하며 신고 및 상담조차 꺼린다며 피해자가족이 합의를 원하면 합의를 유도하고 있으며 파렴치한 가해자는 피해자부모들의 고소장에 따라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 법률에 의거 처리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에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 법률에 제3조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여야한다, 와 동법 제30조(경비의 보조)에 의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상담소기관에 소요되는 경비의 예산을 지원하게 되어있음에도 열악한 완도군의 재정난으로 지난 2년간 예산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그동안 본지에서 적은금액을 후원해 왔지만 광주병원치료와 경찰,검찰 피해조사에 상담사 의무 입회 등으로 완도성폭력상담소는 오는 2008년부터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었다며 1인 1만원 후원자들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전남 완도성폭력상담소의 대표적인 예로, 지난 2006년7월 장애인의 약점을 이용한 파렴치한 성폭력범죄로 장애인가정의 6세, 11세 미성년 정신지체장애 자매를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50대 남성 2명이 경찰에 의거 체포되고 또, 지난 2007년6월21일 우리지역 외딴 섬에서 10세인 어린 여아를 상대로 5년간이나 끔찍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준 바 있다. 가해자는 5년형의 실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우리 사회가 왜 이지경인지. 예절과 인륜은 어디가고 이런 패륜행위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지. 그저 걱정이 앞선다. 장애인 아동의 성폭행'사건은 너무도 엽기적이어서 떠올리기가 싫은 정도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에 봉사하는 상담사들은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주위의 눈을 피해 장애인 어린이들과 여학생에게 만행을 저질렀을까 이해 할 수가 없다는 것. 완도성폭력상담소의 관찰 끝에 전남여자기동대가 신속한 검거였지만, 이 같은 아동 성범죄가 우리 지역에서도 갈수록 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크다. 특히'인격 살인'이라 불리는 13세 미만의 성범죄는 성장 후에도 대인관계 및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태반이다. 마땅히 성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선 체계적인 성교육과 함께 강력한 처벌이 병행돼야 한다. 한편, 피해자의 가족들은 남의일이 아닌 우리의 딸과 손녀가 성폭력으로 부터 안전을 위하여 신속하게 도서낙도까지 피해자를 위해 달려오는 상담사들에게 위로는 커녕, 핀잔을 주는자들이 있다면 이 사회로부터 영원히 퇴출되어야 할 것이라고 분개했다. <새감각, 바른언론- 청해진신문> * 참고: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 법률 제21조 (피해자의 신원과 사생활비밀누설금지) ①성폭력범죄의 수사 또는 재판을 담당하거나 이에 관여하는 공무원은 피해자의 주소·성명·연령·직업·용모 기타 피해자를 특정하여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인적사항과 사진등을 공개하거나 타인에게 누설하여서는 아니된다. ②제1항에 규정된 자는 성폭력범죄의 소추에 필요한 범죄구성사실을 제외한 피해자의 사생활에 관한 비밀을 공개하거나 타인에게 누설하여서는 아니된다. ③누구든지 제1항의 규정에 따른 피해자의 인적사항과 사진 등을 피해자의 동의를 받지 아니하고 출판물에 게재하거나 방송매체 또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공개하여서는 아니 된다. <신설 2006.10.27> 새감각 바른언론 완도청해진 071225-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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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마라톤으로 새해 맞는다!울트라 마라톤으로 새해 맞는다! 새해맞이 강진군 일주 100km 대회 마련 다사다난했던 병술년을 보내고 새로운 도전의지로 시작하는 정해년 설계를 위한 강진일주 울트라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강진울트라마라톤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김성균)는 오는 12월 31일 저녁 7시 강진군과 장흥군 일부를 코스로 하는 새해맞이 울트라마라톤 100km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번 강진울트라마라톤은 드넓은 들판과 남도의 명산 월출산 자락을 끼고 달리는가 하면 수려한 경관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천혜의 미항 마량항 해안가 등 남도의 멋을 눈으로 즐기면서 달리는 최적의 코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부터 접수를 받아 지난 11월 30일 마감을 한 결과 전국각지에서 무려 267명의 울트라 건각들이 신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상 밖의 대회규모로 안전한 대회운영 등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울트라마라톤 조직위원회에서는 배낭과 해드랜턴, 비상식량 미소지자는 출발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김성균 조직위원장은 “출발 전 반드시 스스로의 건강상태를 확인해 줄 것”을 당부하고 “안전한 대회운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환상적인 해안코스를 마음껏 즐기면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강진대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강진 박광헌 기자> 입력:0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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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이며 깨끗한 피로 민주당 부활 총력"민주연합청년회 전남도지부 회장단 워크샵 "뜨겁고 역동적이며 깨끗한 피로 민주연합청년회의 부활을 선포함과 동시에 무한한 생명력과 민주주의 발전의 중심에 있었던 연청인의 자부심을 배양, 민주당을 부활시키는 핵심세력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합시다" 지난 19일 대나무건강랜드에서 열린 민주연합청년회 전남도지부 회장단 워크샵의 서두를 연 강종문 도지회장의 일성.(사진) 배기운 민주당전남도당 위원장을 비롯한 당직자들과 연청 상임지부 회장 및 임원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번 행사는 전남 지역 연청 조직의 재건 및 활성화를 위한 간부들의 의지를 다지는 한편 내년에 치러질 지방선거의 필승과 연청 전남도지부의 도약과 발전을 위해 마련됐다. 이날 강종문 도지회장은 '민주당과 연청이 나아갈 길'을 주제로 한 특강에서 "失政의 연속으로 도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에 국가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어려울 때 일 수록 불굴의 의지를 불태워온 민주당의 기치아래 새로운 정치사의 한 획을 남길 때가 도래했다" 며 "새로운 의지와 기상을 갖춘 연청인들이 그 중심에서 도민들의 여론을 결집하고 이를 정치에 반영함으로써 도민과 함께 호흡하는 실물 정치의 지평을 열어가자"고 말했다. 이를 위해 "연청 조직을 새롭게 재편, 여성국의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올바른 사고와 긍정적인 자세를 갖춘 청년과 학생들과 연대해 밝은 미래를 이끌어 가는 기폭제를 삼고 회원 개개인의 이름이 명예롭게 장식 될 수 있도록 분골쇄신의 마음을 견지해 민주당의 깃발을 전국에 힘차게 나부끼게 하자"고 강조했다. 연청의 산증인이자 산파역을 담당한 배기운 민주당전남도당위원장은 격려사를 통해 "연청은 서슬 시퍼런 군부 독재하에서 출범, 고난과 역경을 민주당과 함께 해 온 정통성을 갖춘 조직으로 대한민국 정치 발전의 중심이 되고 있다"며 "민주당이 바늘이라면 연청은 실로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최근 정치적 격변기로 민주당이 침체돼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민주당 재건의 선봉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연청인들의 의지가 결집된다면 민주당의 부활의 신호탄이자 국민들에게 영원히 각인 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연청인들은 민주당 전남도당 최영환 청년국장으로부터 개정된 선거법 해설 교육을 받은 후 연청 활성화 방안으로 전남도지부 개편대회를 필두로 등반대회, 여성국 '어르신봉사단' 발족, 청년 학생조직, 제1기 민청 정치학회 개강을 통해 명실상부한 민주당의 주체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한 의지를 견고히 다졌다. <전지협 전라남도 협의회>